가치투자자이자 오마하의 현인 워렌버핏은 어떤 사람일까? Part 1(벤저민 그레이엄 / 찰리 멍거 / 버크셔 해서웨이 / 오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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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투자자이자 검소한 생활로 유명한 워렌버핏은 어떤 사람일까? 

 

워렌 버핏은 1930년 8월 30일 주식 중개인인 그의 어머니 레일라와 아버지 하워드 사이에서 태어났다. 둘째였던 그는 두 명의 자매가 있었고 아주 어린 나이부터 돈과 사업에 놀라운 모습들을 보여줬었다.

 

불과 6살 때, 워렌 버핏은 할아버지 식료품점에서 코카콜라 6병을 25센트에 구입을 하였고 각 병당 5센트씩 이익을 팔았다는 유명한 사례가 있다. 그의 또래 친구들이 공부하고 운동하고 예체능 활동을 하는 동안 워렌 버핏은 돈을 벌고 있었다. 그리고 5년 후 11살이 되던 해에 워렌 버핏은 금융시장에 첫 발을 내디뎠다.

 

11살 때 워렌 버핏은 자신과 그의 누나인 도리스 둘 다에게 Cities Service 우선주 3주를 주당 38달러에 샀다. 주식을 산 이후 주가가 주당 27달러 수준까지 떨어졌다. 겁에 질렸지만 워렌버핏은 Cities Service 우선주가 40달러까지 반등할 때까지 주식을 보유했다. 40달러 반등하는 것을 보고 주식을 모두 팔았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주가가 200달러까지 오르면서 그의 투자에 큰 교훈을 주었다: 인내는 미덕이다.  

 

1. 교육

17세가 되던 1947년 워렌 버핏은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신문배달을 통해 5,000달러(2000년 화폐가치: 약 42,610달러)를 모아 대학에 진학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워렌버핏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워렌 버핏에게 펜실베이나 대학의 와튼 비즈니스 스쿨에 다니라고 권유했다.

 

당시 워렌 버핏은 교수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안다고 불평하며 그 대학에 2년만 다니며 오마하로 귀국하였고, 네브라스카-링컨 대학교로 편입을 했다. 풀타임으로 교육을 이수하면서 3년만에 졸업할 수 있었다.

 

워렌 버핏은 졸업을 앞두고 진로에 대해 주변으로부터 하버드 경영대학원에 지원할 것을 권유 받고 설득당했지만 입학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워렌 버핏은 그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결정을 하였고 그것은 유명한 투자자인 벤저민 그레이엄과 데이비드 도드가 있는 콜럼비아 경영대학원에 들어간 것이었다. 워렌 버핏은 이곳에서 벤저민 그레이엄으로 가치투자를 배워 최고의 투자가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2. 멘토 Ben Graham

벤저민 그레이엄은 1920년대에 너무나 유명했다. 마치 룰렛의 거대한 게임처럼 투자무대에 접근하고 있던 시기에 그레이엄은 가치가 싼 주식을 찾아다녔고, 그 중 가장 유명한 사례는 록펠러가가 운영했던 석유 수송 회사였던 Northern Pipe Line이었다. 그 주식은 주당 65달러에 거래되고 있었지만 그레이엄은 대차대조표(Balance Sheet)을 검토한 후 이 회사가 주당 95달러 상당의 채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치 투자자는 그 채권을 팔기 위해 경영진을 설득하려 했으나 경영진을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로부터 얼마되지 않아 벤저민 그레이엄은 이사회의 자리를 맡게 되었고, 이 회사는 채권을 팔고 주당 70달러의 배당금을 지불했다.

 

벤저민 그레이엄이 40살이었을 때, 증권 시장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책 중 하나인 "Security Analysis"를 출판했다. 다우존스 지수가 1929년 폭락 이후 3~4년 동안 381.17에서 41.22로 하락했던 시기로 출판에 위험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레이엄이 주가와 별개로 기업의 진가를 가늠하는 척도인 '내재적 비즈니스 가치(내재가치)'의 원리를 생각해 낸 것이 이 무렵이었다.

 

투자자들은 이 내재가치를 이용하여 기업의 가치를 결정하고 그에 따라 투자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벤저민 그레이엄의 후속 저서 "The Intelligent Investor(현명한 투자자)"를 출판했고, 워렌버핏은 이 책을 역사상 최고의 투자 책이라고 칭송했다. 이 책에서 미스터마켓이라는 용어가 세계에 소개되었고, 지금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는 주식용어가 되었다. 간단하지만 심오한 투자 원칙을 통해 벤 그레이엄은 21세의 워렌 버핏에게 최고의 인물이 되었다.

 

콜럼비아 경영대학원 과정을 거치면서 워렌 버핏은 그레이엄의 수업에서 A+를 받은 유일한 학생이었다. 그가 졸업한 후에 그레이엄과 버핏의 아버지는 모두 월가에서 일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단호히 결심을 한 버핏은 그레이엄 파티너쉽에서 무료로 일하겠다고 제안했다. 벤저민 그레이엄은 당시 다른 회사에 채용되지 않은 유대인들을 위해 자리를 지키고 싶어해서 그의 제안을 거절했었고, 워렌 버핏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3. 오마하로의 복귀

집으로 돌아온 워렌 버핏은 아버지의 중개업소에 취직하여 수지 톰슨이라는 이름의 여자를 만나기 시작했다. 이 만남을 계기로 1952년 4월에 두 사람은 결혼을 했다. 그들은 방 세 개짜리 아파트를 한 달에 65달러에 빌렸다. 방 세 개짜리 아파트는 낡았고, 쥐와 같이 살 정도로 낙후된 곳이었다. 이 곳에서 딸 수지가 태어났고, 이들은 돈을 절약하기 위해 화장대 서랍에 딸을 위한 침대를 만들었다.

 

이런 시기에 워렌 버핏은 어떤 히사가 어떻게 일하는가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회사의 무엇이 경쟁자들보다 우월하게 만들었는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레이엄은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의 숫자에 관심을 많이 가졌지만 워렌 버핏은 투자를 결정할 때 회사의 경영에 더 관심이 있었다. 

 

워렌 버핏은 1950년~1956년에 개인 자본을 9,800달러에서 140,000달러까지 늘리게 되었다. 이 돈을 가지고 그는 오마하에 다시 눈을 돌리고 다음 움직임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1956년 5월 1일 워렌 버핏은 여동생과 이모를 포함하여 7명의 한정적인 파트너에게 10.5만 달러를 모금했다. 그는 Buffett Associates를 만들기 위해 100달러를 투자했고 1956년 말이 되기 전에 그는 30만 달러의 자본을 운용하게 되었다. 그 후 버핏은 3.15만달러에 집을 샀고, "버핏의 어리석음(Buffett's Folly)"라는 닉네임을 지었다. 원래 집의 침실 중 하나에는 그의 파트너십을 관리했고 나중에는 작은 사무실을 운영했다. 이때쯤 그에게는 세 명의 자녀와 아름다운 아내, 그리고 매우 성공적인 사업이 있었으며, 그의 삶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5년 동안 버핏의파트너십은 251%의 놀라운 수익을 올렸고 다우지수는 74.3%에 그쳤다. 그의 고향에서 다소 유명했던 워렌 버핏은 친구들과 낯선 사람들로부터 끊임없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결코 주식정보를 주지 않기로 유명했다.

 

1962년까지 그 파트너십은 720만 달러가 넘는 자본을 가지고 있었고, 그 중 100만 달러가 버핏의 개인적인 지분이었다. 그는 그 파트너십에 대해 수수료를 부과하지 않았다. 또한 워렌 버핏은 미국 전역에 90개 이상의 파트너를 갖게 되면서 버핏 파트너쉽 주식회사라고 불리는 단일 법인으로 파트너십을 결합하고 최소 투자를 10만 달러로 늘렸으며 새로운 사무실을 열었다.

 

1962년, 찰리 멍거라는 이름의 한 남자가 캘리포니아에서 본인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 오마하로 돌아왔다. 다소 속물적이긴 했지만, 멍거는 그 말의 모든 의미에 있어서 찬란했다. 그는 하버드 로스쿨에 학사 학위도 없이 다녔었다. 친구들에 의해 소개로 버핏과 멍거는 즉시 함께했고 향후 40년 동안 사업협력을 할 수 있게 됐다.

 

창립 10년 만에 버핏 파트너십 자산은 1556% 증가하여 다우지수 상승분 122.9%에 10배가 넘는 수익을 기록하였다. 당시 자산은 4,400만 달러까지 증가했고 버핏과 수지의 개인 지분은 약 685만달러가 됐다. 그가 성공을 확고히 하게 되고 새로운 계좌에 대한 파트너십을 닫았다. 그리고 1968년에 파트너십은 최고의 성적을 거두게 되고 59%의 가치 상승과 자산이 1.04억 달러로 급증했다. 다음 해인 1969년에는 워렌 버핏은 파트너십을 청산했다. 그는 "현재 시장에서 어떤 싼 물건도 찾을 수 없다"고 알렸고, Berkshire와 Diversified Retailing이라는 두 회사를 제외하고 포트폴리오를 청산하는데에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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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버크셔 해서웨이 경영

버크셔 해서웨이에서 버핏의 역할은 사실 몇 년 전에 어느 정도 규정되어 있었다. 1965년 5월 보통주의 49%를 보유한 후 워렌 버핏은 자신을 Director로 지정하였다. 끔찍한 경영진이 그 회사를 거의 파산 직전까지 몰고 갔고 이를 조금만 수정한다면 더 잘 관리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즉시 워렌 버핏은 Ken Chase에게 자율권을 부여하면서 회사의 사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주주들에게 불공평하다는 이유로 스톡옵션 부여를 거부했지만 버핏은 신임 사잔이 회사 주식 1,000주를 매입할 수 있도록 1.8만 달러를 대출해주기로 합의했다.

 

2년 후인 1967년 워렌 버핏은 National Indemnity의 설립자이자 지배주주인 잭 링왈트에게 그의 회사의 가치에 대해 물었고, 링왈트는 당시 33달러보다 17달러 높은 주당 최소 50달러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버핏은 그 자리에서 회사 전체 사겠다고 제안했고, 860만 달러를 지불했다. 같은 해에 버크셔는 자사 주식에 대해 10센트의 배당금을 지불했는데 이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당시 워렌 버핏은 "배당이 선언되었을 때 화장실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라고 말했다는 재미있는 인터뷰 내용도 있었다.

 

1970년 버핏은 자신을 버크셔 해서웨이 이사회 의장으로 임명하고 처음으로 주주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회장의 자본배분은 신중함을 표시했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 워렌 버핏은 고급 초콜릿 회사였던 See's Candy라는 회사를 인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았다. 버크셔는 대차대조표와 회사의 맛에 대한 추가적인 프리미엄을 더해 2,500만 달러에 매입할 의사를 밝혔다. See's Candy는 3,000만 달러 요구를 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인정하게 되면서 버크셔나 버핏이 지금까지 한 투자 중 가장 큰 규모의 거래를 하였다.

 

몇 차례의 투자와 SEC 조사에 이어, 버핏은 버크셔 해서웨이의 가치가 상승하는 것을 보기 시작했다. 1965년부터 75년까지 이 회사의 장부금액은 주당 20ㅏㄹ러에서 95달러 선으로 올랐다. 워렌이 버크셔 주식을 최종 매입한 것도 이 기간이었다.

 

몇 년 후, 그는 주당 평균 32.45달러로 회사에 1,540만 달러 이상을 투자했다. 이것은 그의 소유권을 4%가 넘는 주식으로 가져갔고, 수지는 3%를 더 보유하게 되었다. 그의 전 재산은 버크셔에 맡겨졌다. 개인 소유가 없는 그 회사는 그의 유일한 투자 수단이 되어 있었다.

 

1976년 버핏은 다시 한번 GEICO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 회사는 최근에 놀랄 정도로 많은 손실을 보고했고 주식은 주당 2달러로 폭락했다. 그는 기본적인 사업이 여전히 온전하다는 것을 슬기롭게 깨닫고, 경영진의 문제를 지적했다. 그 후 몇년동안 버크셔는 이 보험회사에서 수백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여전히 회사에서 재산을 보유하고 있던 그레이엄은 같은 해 9월 전환 직전 사망했다. 몇년 후 그 보험회사는 버크셔의 완전한 소유의 자회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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